우리 옛 어른들에게 죽음의 준비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생전에 자신이 묻힐 묘를 준비하고 수의를 만들고 관을 짜놓는 일, 유서를 써서 사후의 일을 준비하는 일은 범부들의 당연지사였다. 남은 이들에게 폐가 되지 않게 현세의 삶을 깨끗하게 정리하려 한 뜻은 옛 어른들이 우리에게 건네는 ‘웰다잉’의 모습이다. 죽어서도 계속 입을 옷으로 알고 지었던 옷, 수의를 살피면 행복한 죽음, 아름다운 죽음의 작은 해답이 나온다.
|
옛 어른들이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수의는 특히 저승과 이승을 하나로 보는 긍정적인 내세관이 가장 깊숙이 담긴 물건이다. 장래에 입을 옷이라는 ‘장래옷’, 옷을 입고 내세에 문안 드리러 간다는 의미가 담긴 ‘문안옷’, 먼 곳으로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 ‘먼 옷’, 죽어서도 계속 입을 옷이라는 뜻의 ‘평생옷’까지 그 이름을 가만히 들여다봐도 옛 어른들의 죽음에 대한 철학을 되짚을 수 있다. 수의는 자손이 미리 준비해두면 부모가 장수하는 것으로 여겨, 귀신의 감시 밖에 있다는 윤달이 든 해 윤달에 미리 지어놓았다. 우주의 어디론가로 돌아갈 때 입고 가는 옷을 마련한다는 뜻인데, 인간의 근원으로 되돌아가려는 옛 어른들의 우주관이 담겨 있다. 지방에 따라 결혼 예식 때 입었던 내삼을 수의로 입기도 했고 형편이 어려운 집에서는 평상복 중에서 가장 깨끗하고 좋은 옷을 골라 입혔다고도 한다.
수의는 재료나 제작, 보관 방법 등에 수많은 금기가 있다. 먼저 고양이 털이 들어가거나, 쥐로 인해 좀이 슬거나, 가족 중에서 임산부, 부정한 사람이 수의를 보면 안 되는 것으로 여겼는데 부정한 것을 삼간다는 의미의 금기다. 모시는 자손의 머리가 모시처럼 하얗게 세고 눈이 하얗게 된다는 믿음 때문에, 명주는 땅에 묻히면 썩지 않고 뼈에 감기고 붙는다고 보아 어떤 지방에서는 모시나 명주로는 수의를 짓지 않는 금기도 있었다. 또 수의를 바느질할 때도 많은 금기가 있다. 수의 제작 방법에 관한 금기를 살펴보면 귀한 정성을 들여 저 세상으로 보내드리려는 마음이 담겨 있다. 생존에는 매듭을 매도 되지만 운명한 다음에는 매듭을 짓지 않고 뒷바느질도 안 하는데 이건 가끔 되살아날 때 회생하라는 의미였다. 발이 미끄러워 제사 때 다니기 어려우니 겉은 명주로 하더라도 안은 삼베로 하라는 것에는 죽은 후의 일까지도 염려하는 갸륵한 마음이 담겨 있다. 미리 필요한 양을 잘 생각해 정성껏 짓는다는 뜻에서 바느질하다 실이 짧으면 빼버리고 다시 실을 끼워서 바느질하는 것, 내세와 현세를 이어준다는 의미에서 수의의 실을 길게 늘여뜨려두는 것 등도 마찬가지다. 미리 준비된 수의를 잘 보관하는 것도 중요했는데 보관이 잘못돼 수의가 상하면 자손 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으로 알았다. 수의는 좀이 슬지 않는 오동나무에 보관하거나 좀약이나 잎담배를 창호지에 싸서 넣어 보관했다.
1 한복 연구가 김영석 씨가 어머니를 위해 미리 만든 수의.
이제 아낙들이 둘러앉아 마을 어른의 수의를 미리 준비하는 모습도, 수의를 짓는 날 함께 춤추고 노래 부르고 찰밥을 나누어 먹는 풍습도 찾아보기 힘들다.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그들에게 대량생산된 ‘기성복’을 입혀 보내드리는 것 같아 마음이 씁쓸하다. 얼마 전 한복 연구가 김영석 씨는 어머니를 위해 명주에 꽃수를 놓은 수의를 미리 지어놓았다. 그 수의에는 어머니의 웰다잉을 비는 자식의 갸륵한 마음이 곱게 새겨져 있다.
2 여성의 머리에 씌우는 여모. 3 손발톱 주머니인 오낭. 4 현훈. 5 여성용 신발인 습신. 안은 삼베로, 밖은 명주로 지었는데 제사 때 들른 조상이 미끄러지지 않게 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1, 2, 3, 4의 갖은 수의는 이강선 씨가 만든 것.
남자용 갖은 수의(남자 의복 22가지, 여자 의복 21가지를 갖춘 수의를 ‘갖은 수의’라 한다) 천금, 지욕(지요)+베개, 염포, 소렴금, 대렴금, 저고리+속저고리(속적삼), 바지+속바지(속고의), 두루마기, 도포, 버선, 악수幄手(장갑), 멱모(얼굴 가림), 과두, 오낭五囊(손발톱 주머니), 습신(신발), 복건, 명정, 행전, 현훈 여자용 갖은 수의 천금, 지욕(지요)+베개, 염포, 소렴금, 대렴금, 저고리+속저고리(속적삼), 치마+단속곳, 속바지+속속곳, 원삼, 버선, 악수, 멱모, 과두, 오낭, 습신, 여모, 명
|
병원의 원스톱 장례 서비스에 길들여지고, 대량생산된 ‘기성복’ 삼베 수의가 더 흔해진 지금, 꽃상여 타고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훠이훠이 돌아간다고 믿었던 옛 어른들의 품 넓은 내세관을 되새겨야 할 때다. 옛 어른들의 상례 풍습에서 참된 ‘웰다잉’을 만난다.
|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성장 盛裝 수의 2009년, 윤달이 든 윤년이 찾아왔다. 이제는 윤달에 수의 마련하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처럼 여겨지기도 한다.부득이하게 윤달에 마련하지 못했다면 윤년의 유월 혹은 섣달에 마련하는 것이 낫고, 그도 안 된다면 수의 임자가 예순 살이 되는 해 생일이 든 달에 마련하는 것이 좋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이런 상식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기록을 찾기란 쉽지 않다. 윤달과 수의를 함께 언급한 기록으로는 1849년에 홍석모가 지은 <동국세시기 東國歲時記>가 유일하다. 윤달은 풍속에는 없는 달이라 하여 혼인하기에 좋고 또 수의를 만드는 데에도 좋다. 그런 까닭에 윤달은 꺼리는 것이 없다. 광주 봉은사에서는 윤달을 만나면 서울 장안의 여자들이 다투어 모여 불공을 올리며 또 돈을 탑 위에 놓는다. 이리하여 윤달이 다 가도록 이 행사는 그치지 않는다. _홍석모의 <동국세시기> 중에서 옛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윤달은 죽음의 옷인 수의를 만들고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혼인을 치르기에 더없이 적합한 시간이었다. 이 상반된 듯 보이는 두 가지의 일을 같은 기간에 해도 괜찮다는 인식 뒤에는 우리가 그토록 주목하는 ‘윤달’이 있다.
(위) ‘전통의상 담연’에서 만든 수의 중 원삼. 다른 세상으로 떠날 때 입는 날개옷이다.
윤달은 태음력과 태양력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태음력에서의 1년은 대략 355일이고, 태양력의 1년은 365일이다. 여기서 1년에 대략 열흘 정도 차이가 발생하는데, 이 차이를 줄이지 않으면 계절과 달이 맞지 않는 일이 발생한다. 이 때문에 4년에 한 번씩 윤달을 만든 것이다. 태양력에서 윤달은 4년마다 한 번씩 2월을 하루 늘려 만들지만 태음력에서의 윤달은 일정하지가 않다. 이 윤달 때문에 같은 달이 반복되고 정확히 한 달이 늘어나게 되는 것이다. 한 번의 윤달이 지나고 나면 다시 몇 년을 기다려야 맞이할 수 있다. 윤달이 수의를 만들기에 적합한 때로 여겨진 데에는 이렇게 오래 기다려야 돌아오는 윤달의 특성, 즉 ‘귀함과 드묾’이 자리하고 있다. 옛사람들은 윤달을 인간 곁에 머무르는 신들마저 하늘로 돌아가 쉬는 시간이기 때문에 신들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그래서 혼인, 이사처럼 평소 쉽게 하지 못하는 일을 해도 무방하다고 여겼다. 어떤 일을 해도 탈이 나지 않는 시기였으니, 삶의 마지막 순간을 위해 수의를 지어두는 것도 문제 있을 리 없었던 것이다. 조선 세종 때 좌의정을 지냈고 황희 黃喜(1363~1452)와 더불어 청백리로 이름을 높였던 허조(1369~1439)는 “내가 죽거든 반드시 어머니가 지어준 옷으로 염습하라”라는 말을 남겼다. 평소 자신이 입던 옷, 어머니가 손수 지어준 옷을 습의 襲衣(오늘날의 수의)로 사용해달라는 유언이었던 셈이다. 어쩐지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다르다. 수의는 평상시에 입는 옷과 다르지 않은가? 조선 후기 농학자였던 유중림 또한 <증보산림경제 增補山林經濟>에 “집에서 누에를 길러 명주베가 만들어지면 우선 두 어버이의 수의를 지어두고, 남는 것이 있으면 역시 어버이 의복을 만들 것”이라고 썼다. 그리고 “부모의 나이 마흔이 넘으면 자식으로서 가정 형편이 닿는 대로 서서히 수의를 마련하여 깨끗한 상자에다 별도로 보관해두어야 한다”라고 했다. 즉 부모가 살아 있을 때 수의를 만들어둠으로써 효를 실천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럼 허조의 유언은 그저 검박한 삶을 산 신하의 평범하지 않은 소원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이덕무의 글을 통해 허조의 유언이 옛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일찍이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니, 옛날에는 여인들이 의복을 너그럽게 마련한 까닭으로 시집갈 때 만든 옷을 가히 죽어 시체를 염할 때 쓸 만하였다고 하니, 사람은 살았을 때와 죽었을 때, 늙었을 때와 젊었을 때는 몸집의 크기가 같지 않으므로 그 옷이 좁지 아니하였음을 가히 알 만하다. _이덕무의 <사소절> 중에서
일상복이 수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크기와 길이의 넉넉함 때문이었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허리까지 내려오는 저고리에 풍성한 치마와 바지를 입고 살았다. 사람이 죽어 시신이 굳어진다 해도 옷 자체가 여유로우므로 그대로 입히기가 어렵지 않았다. 더욱이 옷감이 귀한 시절이었다. 그러니 굳이 수의를 따로 마련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서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차츰 사람들은 옷을 몸에 꼭 맞게 만들어 입기 시작했고 그런 옷을 몸이 굳은 시신에 입히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로부터 자연스럽게 사후 死後에 혹은 생전의 적절한 시기에 일상복보다 넉넉한 크기의 수의를 만드는 풍습이 생겨나게 되었다.
실제로 자신이 입던 옷을 수의로 입고 가는 풍습은 왕으로부터 사서인에 이르기까지 다르지 않았다. 세종 2년, 태종의 비였던 원경왕후가 훙거 薨去했을 때 역시 생전에 입던 관복을 수의로 사용했다. 조선 중기 무덤에서 출토된 수의에는 그것이 일상복이었음을 짐작케 하는 흔적이 제법 많이 남아 있다. 저고리 동정과 소매 끝에 남아 있는 까만 얼룩과 때, 군데군데 해진 부분을 수선한 자국이며 알뜰하게 자투리 천을 이어 붙인 안감도 그대로다. 1979년 5월 시흥에서 출토된 청주 한씨의 스란치마는 연꽃 문양 가득한 비단 바탕에 금실로 포도와 동자 문양을 넣은 스란 단을 통해 이미 16세기 복식의 화려함과 미감을 선보였다. 출산 중 사망했으며 복중에 태아가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세상을 놀라게 한 파평 윤씨 모자 母子 미라(2002년 출토)는 금실을 넣어 짠 금직 저고리를 입고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렇게 옛사람들은 자신이 평소에 입었던 옷, 혼인할 때 입었던 옷 가운데서 가장 곱고 좋은 옷을 입고 마지막 길을 나섰다.
옛사람들의 기록과 1926년 <조선재봉전서>를 쓴 김숙당 金淑堂의 글, 그리고 출토 복식을 통해 마주하게 되는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수의가 본래 고운 색을 지닌 옷이었다는 점이다. 우리는 으레 수의는 흰색 또는 소색 素色(직물 그대로의 누런빛)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고정관념에 불과하다. 혼인할 때 가져온 원삼을 고이 챙겨두었던 조선 시대 여인들 역시 붉고 푸른 빛이 그대로 남은 원삼을 수의로 입고 갔다. 아울러 수의에 물을 들여 고운 색을 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다만 물을 들이기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옷감을 깨끗하게 손질해서 사용하는 사람이 많았고, 그 때문에 소박한 빛깔을 띠는 경우가 늘어난 것뿐이다.
세포로 수의를 지을 때 물감을 들여서 하는 법인데 그 물감은 보통 물감이 아니니라. 청을 들이려면 청대물을 들이고 홍을 들이려면 잇다홍을 들이고 황을 들이려면 홰나무 열매를 들이고 자주를 들이려면 지치를 들이고 분홍을 들이려면 연지를 들이느니라. 이러한 물감을 들이기가 대단히 불편하기로 그냥 세포를 정히 빨아서 다듬어 짓는 이가 많으니라. - 김숙당의 <조선재봉전서> 중에서
죽은 사람이 세상에서 입는 마지막 성장이라는 의미가 결코 가볍지 않았던 탓에 수의는 여러 가지 금기로 겹겹이 봉인되었다. 사후에 마련하는 수의의 바느질이 너무 꼼꼼하면 죽은 사람의 영혼이 저승으로 더디 가게 된다고 믿었다. 옷감을 이어 쓰느라 이음매가 생기는 것도, 실 끝에 매듭을 지어 바느질을 시작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영혼이 가는 길에 매듭 하나하나, 이음매 한 골 한 골이 걸림돌이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신 매듭을 짓지 않은 실 꼬리가 빠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 풀솜을 비벼 굵게 뭉쳐놓았다.
수의를 입히는 방법 또한 다르다. <사례편람>과 같은 예서에 따르면 수의는 산 사람과 같은 우임 右 (겉자락이 오른쪽을 향하도록 입는 것)으로 입혀야 한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지도 모른다는 여망을 쉽게 버릴 수 없는, 산 사람들의 마음을 고려한 것이다. 그러나 소렴부터는 그 희망을 접고 산 사람과 반대 방향, 즉 좌임으로 여며 입힌다. 비록 사소한 변화지만 그로써 온전히 죽은 사람을 떠나 보낼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의미다. 이것이 산 사람과 죽은 사람을 달리 여기는 좌임불뉴 左 不紐의 원칙이다.
부모의 죽음을 자식의 죄로 여겼던 조선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마지막 성장을 마련해드리는 것을 효로 여기는 마음은 다르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평상시 입던 옷을 수의로 입고 간 옛사람들의 검박함이나 부모 나이 마흔이 될 무렵부터 차근차근 마련하기를 권고했던 유중림의 글 앞에서, 윤달만 되면 어김없이 나타나는 수의 구입 열풍과 몇천만 원을 호가하는 ‘명품 수의’의 존재는 어쩐지 공허하게 느껴진다. 수의는 삶을 마감하는 순간, 겸허하고 정갈한 몸가짐을 완성하기 위해 준비하는 옷이다. 옛사람들이 자신이 추억하고 싶은 순간과 일상을 담은 옷이면 족하다고 여겼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비록 그 마음과 같지는 않을지라도 한 번쯤 음미해봄 직한 일이다. 수의에 관한 옛사람들의 뚜렷한 생각과 소박한 실천을 말이다.
예법에 맞춘 수의 일습 일반적으로 남자용 수의는 22종, 여자용은 21종으로 구분한다. 하지만 지역이나 시대에 따라 수의의 종류와 망자에게 수의를 입히는 순서가 달라지기도 한다. 남자용 수의 일습 천금, 지요+베개, 염포, 소렴금, 대렴금, 저고리+속저고리(속적삼), 바지+속바지(속고의), 두루마기, 도포, 버선, 악수, 멱목, 과두, 오낭, 습신 , 복건, 명정, 행전, 현훈 여자용 수의 일습 천금, 지요+베개, 염포, 소렴금, 대렴금, 저고리+속저고리(속적삼), 치마+단속곳, 속바지+속속곳, 원삼, 버선, 악수, 멱목, 과두, 오낭, 습신, 여모, 명정
1 여모 모자 2 베개 3 멱목 얼굴을 덮는 천 4 과두 머리덮게 5 오낭 손톱, 발톱을 담는 주머니 6 대렴금 시신을 둘둘 마는 이불 7 천금 주검을 싸고 묶어 입관할 때 쓰는 이불 8 습신 9 버선 10 악수 손싸개 11소련금 시신 밑에 까는 이불 12 지요 관에 까는 요
전통 상례 절차와 수의 전통 상례의 19가지 절차 중 수의와 관계되는 순서로 습 襲과 염 殮이 있다. 시신을 목욕시키고 수의를 입히면서 시신을 정화하는 절차를 습이라 하고, 습이 끝난 시신을 이불로 싸서 묶고 입관 준비를 하는 것을 염이라 한다. 염은 두 단계를 거치는데, 운명 다음 날 시신을 베로 싸서 묶어 입관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소렴, 소렴 다음 날 싸서 묶은 시신을 입관하는 절차를 대렴이라고 한다. 망자에게 수의를 입히는 순서는 이 습과 염의 절차에 따르며 세부적인 순서는 지역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1 단속곳 2 치마 3 속저고리 4 저고리 5 당의 6 원삼
수의를 입히는 순서 1 습 임종한 시신을 씻기고 버선과 악수로 손발을 감싼다. 옷은 하의(단속곳-치마-버선-습신)에서 상의(속저고리-저고리-당의-원삼) 순서로 입힌다. 마지막에 멱목으로 얼굴을 감싸고 여모를 씌운다. 2 소렴 소렴금을 깔고 지요와 베개를 놓은 다음 시신을 요 위로 옮겨 천금으로 묶는다. 3 대렴 소렴이 끝난 시신을 위아래로 묶고 대렴금으로 덮은 뒤 멧베로 단단히 묶는다.
|
전통 수의, 어디서 구입하나 전통의상 담연 한복 디자이너 이혜순 씨의 전통 의상실. 양단과 명주를 섞어 수의를 지으며, 제작하는 데 약 한 달이 소요된다. 단속곳과 너른바지를 하나로 만드는 등 전통을 따르되 현대적 해석을 가미했다. 문의 02-546-6495 박선영 전통한복연구실 서울시 무형문화재 침선장 박광훈 씨가 운영하는 전통 한복 의상실(박선영은 박광훈 씨의 예명). 명주, 실크 등으로 수의를 제작하며 살에 닿는 부분은 삼베로 만든다. 문의 02-742-2438 동안동농협 임하지점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1호 안동포의 재배지인 안동시 임하면 금소리와 고곡리에서 생산하는 안동포 원단만을 판매한다. 모든 제품은 14 단계의 공정을 거치며 안동포 마을 주민들의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안동포로 만든 수의는 주문, 구입할 수 있다. 문의 054-822-9991, www.imha.co.kr |
| |
|
19세기 중반 만석군 최필주가 죽었을 때 썼던 전주 최씨 고령댁 상여. 목조각의 백미를 보여준다(중요민속자료 제 230호), 1856년,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저세상 갈 때 타고 가는 아름다운 집 상여
상여나는 순서는 있는데 왜 죽는 차례는 없을까 세상만사, 인간사 모든 일은 질서가 있고 순서가 있다. 그렇다면 사람도 나는 순서대로 죽는 게 이치에 맞는 말이다. 하지만 유독 죽음만은 그 순서가 없다. 왜 태어나는 순서는 있는데 죽는 순서는 없을까? 아주 옛날 까마귀가 염라대왕의 저승사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하루는 까마귀가 저승으로 데려갈 사람의 명부를 물고 저승으로 가고 있었다. 아래를 보니 마침 마을에서 잔치가 벌어져 배도 출출하던 차라 잠시 마을로 내려가 정신없이 배를 채웠다. 다시 날아가 저승 문턱을 넘으려는데 입에 물고 있던 명부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깜박 잊고 사자의 명부를 잔칫집에 놓고 와버린 것이다. 까마귀는 먼 길을 다시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명부에 적혔던 사람의 이름도 생각나지 않아 하는 수 없이 평소 알고 있던 사람의 이름을 적어 가지고 갔다. 그래서 정작 잡혀갈 사람은 안 가고 엉뚱한 사람이 사자 명부에 올라 저승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나는 순서는 있어도 죽는 순서는 없어졌다고 한다. 까마귀의 실수로 그만 죽는 순서와 질서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제주도에서 전해져오는 것으로, 까마귀 고기를 먹으면 건망증이 심하다고 하는 게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까마귀의 건망증만 아니었더라면 사람도 나는 순서대로 생을 마쳤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우리는 까마귀 덕택에 오래 건강하게 살려고 운동도 하고 다이어트도 한다. 아마 나는 순서대로 죽는다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없을지 모르나 세상 사는 맛도 없을 것이다.
왜 하필이면 삼년상일까 오늘날에도 행해지는 유교식 상례, 즉 전통 상례의 핵심은 삼년상(만 2년 상)이라 할 수 있다. 1년상 혹은 2년상으로 할 수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삼년상일까? 공자는 삼년상을 치르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자식이 태어난 지 3년이 된 뒤라야 비로소 부모 품을 떠나는 것이다. 대체로 삼년상은 천하의 공통된 법이다.” 한번은 공자의 제자 재아가 물었다. “삼년상은 너무 깁니다. 군자가 3년 동안 예를 익히지 않으면 예의가 무너지고, 3년 동안 음악을 연주하지 않으면 잃어버리게 됩니다. 나무도 철 따라 바뀌니 1년이면 그칠 만합니다.” 그러자 공자는 “3년도 안 돼 쌀밥 먹고 화려한 옷을 입어도 네 마음이 편하냐? 군자는 상을 당하면 음식을 먹어도 단맛을 못 느끼고, 음악을 들어도 즐거움을 못 느끼고, 집 안에 살아도 편안하지 못한다.” 재아가 물러가자 공자가 다른 제자에게 말했다. “재아는 정말 어질지 못하구나. 어린애가 태어나면 3년 이후라야 부모의 품을 벗어난다. 재아도 부모에게서 3년 동안 아낌을 받았을 것이다.” 한마디로 삼년상이란 젖먹이를 3년 동안 품 안에서 온갖 정성과 사랑으로 길러준 부모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다. 또한 그것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애통한 마음이 너무 깊기 때문이다. 해가 한 번 돌면 천도 天道도 한 번 변하고, 사람의 마음도 역시 그것을 따라 변한다. 그러나 어버이에 대한 효심은 1년이 지나도 오히려 잊지 못하는 것이고, 해가 두 번 바뀌어도 잊지를 못하지만, 3년이면 어지간히 슬픔도 변해 일상으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3일 이전의 입관은 살인 행위 사람은 죽으면 누구나 관 속에 들어간다. 그렇지만 아무 때나 관 속에 넣으면 안 되고 입관도 때가 있다. 요즈음은 죽으면 다음 날 시신을 묶어 관에 넣는다. 장례 기간이 3일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날에는 죽은 지 3일(만 2일)이 지나야 염을 해 입관했다. <예기> 문상 편에서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3일이 지나 염을 하는 것은 다시 살아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3일이 되어도 살아나지 않으면 역시 살아나지 못하는 것이며 효자의 마음 역시 더욱더 쇠잔해졌으므로 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에 이르러서야 집안 사정에 맞는 장례 비용과 상복, 각종 상장 제구를 갖출 수 있으며, 또한 멀리 있는 친척도 오게 된다. 이런 까닭으로 성인이 이를 위해 결단하여 3일로써 염하는 제도를 삼은 것이다.” 또 다시 살아나기를 바라는 마음도 담겨 있었다. 조선시대 유계(1607~1664)는 <가례원류 家禮源流>에서 “조간자라는 사람은 죽은 지 열흘이나 되어 혀와 귀에 구더기가 생겼는데도 죽지 않고 살아났으므로 3일 전에 입관하는 것은 살인의 기가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 한마디로 3일 이전에 입관하는 것은 살인 행위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 상례에서도 입관하기 전까지는 시신을 묶지 않고 얼굴을 싸지 않는다. 혹 다시 살아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도 수의를 입히고 염을 할 때 단단하게 묶을지언정 매듭은 짓지 않는다. 혹시라도 시신이 깨어날지 모르기 때문이다. 깨어나면 저절로 풀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3일 입관은 곧 생명 존중의 사상이다. 요즈음은 어떤가. 숨이 끊어지지가 무섭게 밀폐된 냉동실에 넣어버린다. 다시 살아난다 할지라도 살 수가 없다. 세상이 변해도 많이 변했다.
상주와 지팡이 멀쩡한 사람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진 않는다. 그런데 멀쩡한데도 지팡이를 짚는 사람이 있다. 바로 상주이다. 왜 상주는 몸도 멀쩡한데 지팡이를 짚는 것일까? 이유는 간단하다. 2천여 년 전에 쓰인 <예기>에 “효자가 부모를 잃으니 몸과 마음이 상하고 눈물을 흘리는 일이 수가 없고, 근심과 괴로움으로 삼년상을 나니 몸은 병들고 메마르기 때문에 지팡이로 병든 몸을 부축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한마디로 부모가 돌아가시면 슬픔으로 제대로 먹지 못해 몸이 허약해지기 때문에 지팡이를 짚는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면 죽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그런데도 조상들은 평소 잘 모시지 못해 부모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죄인으로 여겼다. 죄인이기 때문에 상주는 음식을 평상시처럼 마음대로 먹지 못한다. 몸은 쇠약해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건강한 게 이상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 몸을 너무 훼손시켜 목숨을 잃는 경우까지 생겨 도리어 불효를 저지르는 일까지 속출했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왕세자와 대군 이하 여러 아들은 3일을 굶되 죽을 조금 먹고, 3일 뒤에는 밥을 먹고, 한 달이 넘으면 술을 조금 마시고, 장사를 마치면 고기를 조금 먹도록’ 했다. 또한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대나무 지팡이(竹杖)를 짚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오동나무 지팡이를 짚는다. 누가 돌아가셨는지 굳이 물을 필요도 없다. 지팡이만 보면 금세 알 수 있다. 부상 父喪에 죽장을 짚는 것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하늘과 같은 존재이니 둥근 대가 하늘을 의미한다. 안팎에 마디가 있는 것은 아들이 아버지를 잃어 안팎으로 슬픔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대가 사시사철 변하지 않는 것은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여 사계절이 지나도 변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한편 어머니 상에 오동나무를 사용하는 것은 오동나무의 ‘동’ 자가 동 同 자와 음이 같은 것을 취해 슬퍼함을 아버지 상과 같게 하라는 뜻이다. 이처럼 지팡이만 보아도 누가 돌아가셨는지 알 수 있는 상주의 지팡이는 단순한 지팡이가 아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지팡이 하나에도 인효 사상을 담았다.
영구를 장지로 옮길 때 혼백을 싣고 가는 가마인 ‘영여’, 오른쪽은 상여 장식 목조각 인형.
상여와 저승길 안내자 “이제 가면 언제 오나 / 북망산천이 멀다고는 해도 / 대문 밖이 저승이네 / 염라대왕 부름을 받고 / 이제 가면 언제 오나 / 우리 부모님 가는 길 / 일가나 친척이 많다 한들 / 어느 누가 대신 가랴 / 내 친구가 많다 한들/ 어느 누가 동행할까.” 상엿소리의 한 대목이다.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저승으로 가야 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죽으면 꽃상여를 타고 이승을 떠나 저승으로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상여는 한마디로 이동식 주택이지만 망자가 타고 가는 집으로 여겨 모양도 산 사람의 집처럼 난간과 툇마루 형식을 취했다. 더욱이 상여는 망자가 마지막으로 타는 것이기에 임금이나 쓸 수 있는 용과 봉황으로 장식하도록 하여 그 어느 가마보다 더 화려하게 꾸미는 것이 특징이다.
조각품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집 모양의 상여는 유불선 사상과 민간신앙이 녹아 있어 한국인의 저승관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특히 경상도 지역의 상여에는 목각 인물상이 많이 부착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1856년 만석군 최필주 崔必周가 죽었을 때 썼던 산청 전주 최씨 고령댁 상여는 목조각의 백미라 할 수 있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국립민속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누각식 건물 형태로 매우 독특한 양식을 취했다. 1층은 관을 감싸는 덮개 역할을 하는 소방상으로 청룡과 황룡을 투각하고, 19개의 목조 인물상을 세웠다. 1층 상부의 네 귀에는 봉황을 조각해 설치하고 중앙 상부에는 정 丁 자형 용을 조각하여 설치했다. 2층 난간에는 1층과 달리 용이 아닌 새, 너구리, 사슴, 거북 등의 서수를 조각했다. 그리고 난간 궁판 위쪽에는 1층처럼 16개의 목각 인형을 세웠는데, 두 개만 빼고 모두 여자이다. 이들 남녀 목인상은 망자를 호위하는 뜻이 담겨 있다. 특히 상여 3층 평판 전후좌우에는 사람이 탄 십이지신상을 배치했는데 다른 상여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십이지신상의 배치는 망자를 안전하게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해 각 방위를 지키게 한 것이다. 4층 지붕 용마루에는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새 다섯 마리를 꽂았고, 추녀마루 끝 네 곳에는 날개를 접은 저승새를 한 마리씩 배치했다. 이 새들은 상여를 메고 갈 때나 바람에 움직이도록 했다.
상여에 장식한 인물상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사자나 호랑이, 말, 해태, 봉황, 학과 같은 서수를 타고 있는 사람, 마치 덤블링하듯이 물구나무를 서거나 둘 혹은 셋이 어깨를 타고 올라선 모습 등이다. 두 번째는 동자나 여인이 손에 다양한 지물을 들고 있는 것이다. 소매 속에 손을 넣어 공수 拱手 자세를 취하거나 혹은 두루마리나 붓, 칼, 연봉, 책 형태의 명부를 들거나 사자를 안고 있는 모습이다. 불교에서 동자는 항상 사람들 곁에 있으면서 그 사람의 선악 행위를 명부에 기록하고 하늘에 보고하는 일을 맡는다. 지물 중 연꽃은 활짝 핀 것이 없고 봉오리 형태인 것이 특징이다. 연꽃은 청정의 세계를 상징한다. 서과는 복숭아가 기본이고 석류, 가지, 수박, 참외 등의 과일로, 연잎으로 싸거나 연잎 받침에 올려 이고 있는 모습이다. 이는 부처님께 과일을 올리도록 하여 죄가 소멸하고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바람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서수, 서조는 사자, 호랑이, 봉황, 학 등이다. 이것을 탄 동자나 다른 인물들은 천계에 속한 존재로 천상과 지상을 오가는 신통력을 지닌 것으로 여겼다.
그렇다면 무슨 까닭으로 상여에 이러한 인물상을 장식한 것일까? 사람은 혼 魂(영혼)과 백 魄(육신)으로 되어 있어, 죽으면 혼과 백이 분리되어 몸은 땅에 묻히고 영혼은 저승으로 가 심판을 받는 것으로 여겼다. 그 영혼은 염라대왕의 명을 받고 달려온 저승사자에 이끌려 저승으로 간다고 생각했다. 사자는 명부를 손에 들고 청사슬과 홍사슬을 걸머지고 달려와 쇠몽둥이로 등을 치고 쇠사슬로 얽어매어 사람의 넋을 떼어 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저승사자는 이승에 내려와 넋을 빼앗는 존재이지만 저승길의 난관을 헤쳐가면서 동행하는 것으로 여겼다. 그래서 숨이 떨어지면 먼저 사자밥을 차려 사자의 마음을 달래고자 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은 상여에 나무로 깎은 동방삭을 앉히고 인물상을 장식해 저승사자에 끌려가는 영혼이 무사히 저승까지 갈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풍속에는 몸은 죽었을지언정 혼은 살아 있는 것으로 여긴 우리 민족의 사생관이 담겨 있다.
|
상례 문화를 경험할 수 있는 곳
박물관 ‘쉼’ 전통 상례 문화를 소개하는 전문 박물관으로 소장품이 1천 80여 점에 달한다. 주택을 개조해 만든 전시관도 이색적이다. 월요일은 휴관이며 오전 11시~오후 7시. 문의 02-396-9277 국립민속박물관 한국인의 생활 문화를 선보이는 민속 자료 전시관으로 상례, 제례 자료를 전시하는 ‘한국인의 일생’ 관은 온라인 관람도 가능하다. 화요일은 휴관이며 오전 9시~오후 6시. 문의 02-3704-3114 목인박물관 상여에 장식하던 목조각상을 만날 수 있는 곳. 화려한 상여와 조각상을 통해 선조들의 저승관을 접할 수 있다. 관람일은 화~토요일, 오전 10시~오후 7시. 문의 02-722-5066 횡성 태기문화제 매년 정월 대보름부터 이틀간 열리는 장례 문화 축제로, 횡성 회다지소리와 상여 행렬, 입관 체험, 유서 쓰기 등을 선보인다. 문의 033-340-2224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