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화성 - 무봉산(舞鳳山) 만의사(萬儀寺)
- 대동여지도에 보이는 무봉산(舞鳳山)의 이름은 만의산(萬義山)이다.
- 신라 때부터 있었다는 만의사(萬儀寺)가 산 동남록에 있었기에 그렇게 불리었던 모양이다.
넘어 무봉산을 일으키고 그 아래 진위(振威)라는 큰 마을을 틔워낸다. 안성, 평택, 용인 등이
바로 산과 내를 두고 이웃에 있는 이름 난 마을들이다.
기흥 IC 옆으로 넓지 않은 도로를 따라 구불구불 들어가는데 공장, 연구소, 회사들이 즐비하다.
또 한적하다 싶으면 얼굴을 내미는 돈깨나 들었음직한 음식점은 골프장 때문일 터.
동탄면 중리 버스 종점에 닿고 나서야 산을 따라 들어온 길이 한참임을 깨닫는다.
만의사의 옛터에는 지금 태고종 사찰인 원각사가 들어서 있다. 무봉산 기슭,
지금의 동탄면 신리가 만의사의 옛터라고 하는데 숙종 15년(1689)에 우암 송시열의 묘자리가
되면서 절을 중리의 현위치로 옮겨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의 원각사는 우암의 무덤이 다시 속리산 자락으로 옮겨감에 따라 그의 후손들이
세운 것이라고 한다.
오랜 절터를 옮기게 할 만큼 기세 등등했던 당시 유학자의 힘을 알 만한 대목이다.
그런데 우암 자신의 고향도 아닌, 더군다나 깊고 깊은 이 산골에 묘를 쓴 까닭은 또 무엇일까?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우암이 한때 만의사에 머물렀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왕세자 책봉 문제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정읍에서 사사되었으니 가문에 큰 화를
입힌 셈이 되었다. 때문에 말년에 머문 만의사와 무봉산 자락이 인연이 되어 그의 묘를
이곳에 쓰게 된 것은 아닌지 무딘 추측만 해볼 따름이다.
주자학은 물론 지리학(풍수)에도 조예가 깊었을 그였으니 무봉산 자락의 복된 기상이
그에게도 특별하게 각인되어 있었으리라.
“수원의 동쪽 수십 리 거리에 절이 있으니 만의사(萬義寺)라고 한다.
나라의 복리(福利)와 비보(裨補)를 기구(祈求)하던 옛 절이다. 파괴되고 폐지된 것이
이미 오래되어서 초목이 우거진 황무지가 되었더니, 황경(皇慶) 연간 천태종의 진구사(珍丘寺)
주지인 혼기(混其) 대선사가 옛 터를 와서 보고 새로 절을 중건하였으며,
삼장법사 의선공(義璇公)이 뒤를 이어 절을 주간하였다.”
서력 1392년 2월, 21일 동안이나 계속된 대법회 때 권근(權近)이 쓴
‘수원만의사축상화엄법화회중목기(水原萬義寺祝上華嚴法華會衆目記)’의 내용 일부인데
만의사의 내력과 비보사찰로서의 옛 모습이 흥미롭다.
‘무봉산 만의사 사적비’에는 이후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때에 큰 역할을 한 신조(神照) 대사의
중건과 사명당의 제자 선화(禪華) 대사의 주석을 조금 더 자세하게 적고 있다.
그리고 송시열의 초장지 선정을 현종 10년(서력 1669)이라 밝히고 있는데 이는 그의
생몰 연대와 비교해 볼 때 어떤 잘못이 전해져온 것으로 보인다.
40년을 만의사에서 살았다는 여든다섯 노보살님이 절의 내력을 줄줄 외우시는데 용주사보다
컸다는 만의사 자랑이 대단하다.
쌀 씻은 물이 30리 아래 오산까지 흘렀다는 이야기며 ‘장수우물’, 법당을 세 번 옮긴 이야기 등이
늦은 밤까지 쉬지 않고 쏟아진다.
옛날 만의사 스님들은 보통 백년을 넘게 살았는데 힘도 보통 사람과는 달랐다.
법당 아래 장수우물 때문이었는데 어떤 도인 스님이 만의사를 지나다 물을 마시려고
그릇을 청하자 그 행색을 보고 함부로 대했다고 한다.
도인 스님은 가사장삼을 수하고 다시 돌아와 큰 돌로 그 우물을 막아버렸는데 만의사 스님들의
힘이 어찌나 센지 그 돌을 번쩍 들어내는 것이었다.
스님들이 이렇게 힘만 세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한 도인 스님은 법당을 옮겨 짓고는
장수우물을 숨겨버렸다고 한다.
이 우물물을 마시면 장수가 되고 나라를 어지럽히게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밤새 봄을 재촉하던 비가 내리더니 새벽녘에는 돌아서는 겨울을 붙잡는 흰 눈이 내려앉았다.
이른 아침 무봉산 만의사는 산도 하늘도 자욱한 골안개에 덮여 깊은 산중 고찰임을
다시금 확인시켜 준다.
전날 어둠 때문에 분간하지 못했던 만의사를 참배하는데 옛 절터에서 그대로 옮겨와 다시 지었다는 대웅전이 오랜 세월을 이기지 못한 듯 이울었다. 그 안 은행목 옛 부처님을 뵙고서도 3년 전 단정히 입은 금빛 옷 때문인지 옛 자취를 보지 못한다. 준수한 용모의 청년 부처님이시다.
법당을 나와 포근한 날씨와 함께 산을 오르는데 눈과 안개와 바람이 만든 설화(雪花)가 피었다.
불과 30여 분 만에 산마루에 닿는데 안개가 걷히면서 만의사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부드러운 산줄기가 절을 감싸안고 마루금에서 내려선 한 줄기에 법당이 섰는지라
지난 밤 들었던 이야기가 더욱 그럴 듯하게 다가온다.
‘아흔아홉고개’ 너머로는 용인 땅이고 멀리 수원 광교산이 어렴풋하다. 산줄기 이쪽 저쪽으로
들어선 골프장이 살을 드러낸 몸뚱이마냥 애처로워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한다.
골프장은 지금 휴장이다. 원각사, 즉 만의사 옛터가 골프장 안에 있기에 난데없이 쓸쓸한 골프장
구경이다. 2Km 남짓 더 들어가니 산등성이까지 길이 났는데 그 아래 움푹 패인 곳에
원각사가 들어온다. 아뿔싸! 이 높은 곳까지 흙을 쌓고 있지도 않은 산을 만들어 놓았구나.
때문에 옛 만의사에서 달빛 아래 내려다 보았을 저 아래 계곡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발 밑에 뒹구는 기와조각만이 오랜 절터였음을 말없이 대변하고 있는데 요사 한쪽
군데군데 떨어져나간 채에 놓여 있는 안내문에 눈길이 머문다.
‘현종 10년 불상 일부와 대고(大鼓)는 용주사로 대범종은 팔달문에’ 옮겨갔다는
문구로 열반하신 수암 스님께서 써 놓으신 안내문이다.
부분부분 보이는 안내문에는 또 부도 7기가 안치되어 있으나 현재 3기의 부도만 남아 있고
서방 앞 산 중턱에 서산 대사가 사용하던 우물이 있어서 예부터 서산재라고 전해지고
이 우물에 기우제를 지내곤 했다고 적고 있다.
용주사로 옮겨간 지장보살상과 시왕상 역시 용주사의 지장전 건축(서력 1894) 이후일 터이므로
안내문의 연대는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아야 하겠다.
원각사 오른쪽 길로 10여 분 오르니 기울어진 채 반쯤 흙 속에 묻힌 선화대사비와 부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문수산에서 보았던 풍담대종사비처럼 몸돌과 머릿돌이 한 돌로 된 탑비인데
용이 노니는 활달한 모습에서는 돌장이의 오롯한 정성과 세련된 솜씨를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계곡 너머로까지 흙을 밀어다 놓고 골프장을 만드느라 반쪽이 된 터전이며 한쪽으로
기울어져 방치된 채로 놓인 풍광이 따뜻한 볕이 드는 골짝에서 그저 눈을 시리게 만든다.
용주사 지장전에 모셔진 만의사 지장보살님은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앉아 계신 모습이 인상적이다. 순간 같은 방향으로 기운 선화대사비가 연상되어 어딘지 모르게 부자연스럽게 다가온다.
팔달문루(樓)에 높이 매달아 놓은 만의사 범종은 고려 문종 34년(서력 1080)년 처음 주조되었던 것을 숙종 13년(서력 1687) 다시 쇠를 부어 만든 것이다. 선화대사비의 머릿돌에서 꿈틀거리던 용이 이 범종에는 활짝 핀 꽃과 함께 생동감 있게 움직이는데 전체적인 비례, 보살상 등의 표현 또한 아름다워 보기 드문 훌륭한 작품이라 해야 하겠다.
종신의 두툼한 두께가 어떤 소리를 자아낼지 궁금하기만 한데 고려말 천태종의 중심사찰로 그리고 억불숭유의 조선시대에도 큰 사세를 자랑했던 만의사가 다시금 옛모습을 되찾아 그 종소리 무봉산 너머 한남정맥의 골골로 메아리치기를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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